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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한반도의 역사와 같이 걷다

  • 작성자세계김치연구소
  • 작성일시2024.05.13 16:16
  • 조회수1600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밥상 앞에 앉았을 때 가장 낯선 것이 무엇일까? ‘상 위에 놓여 있는 젓가락?’ 젓가락은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지 몰라도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음식 문화에서 이미 본 적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찬은 어떨까?’ 아마도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어느 문화권이든 한 상에 일품요리 한두 가지 놓고 먹는 일이 대부분인데, 우리의 밥상은 그릇마다 갖가지 반찬을 담아서 가득 차려 놓으니 얼마나 진풍경이겠는가. 반찬은 보통 영어로 ‘side-dish’라고 옮기지만,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알맞은 번역은 아닐 것이다.

반찬은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특수한 우리 음식 문화다. 〈여우야 여우야〉라는 동요의 가사를 떠올려보자. 동요는 “뭐하니”라는 화자의 질문에 여우가 답하고, 화자는 다시 그에 대해 화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우가 “세수한다”, “옷 입는다”라고 답했을 때 화자는 여우에게 “멋쟁이”, “예쁜이”라고 답하며 끝맺은 반면, “밥 먹는다”라는 답에는 “무슨 반찬?”이라며 되묻는 장면이다. 화자가 되물은 까닭은 “밥 먹는다”라는 말에 ‘반찬도 함께’라는 행위가 내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에서조차 ‘밥과 반찬은 함께’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밥과 함께 먹는 반찬 가운데 대표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개는 가장 먼저 김치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김치를 먹었을까? 우리가 먹는 김치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김치는 같을까? 고춧가루로 버무린 빨간색 김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치의 시작과 옛 문헌 속 기록
농경과 정착 생활을 불러 온 신석기 혁명은 인류의 생활양식을 바꾼 획기적인 변화였다. 일정한 지역에 정착해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이래로, 농업으로 식량을 확보하는 구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수렵, 채집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활동 지역이 고정됨에 따라 수렵·채집에 비해 구할 수 있는 종류와 양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농사는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오늘날까지 식량 확보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면서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게 되자 인류는 불안한 미래를 일정 정도 예측 가능한 미래로 바꿔 나갔다. 각자의 의지에 따라 식량을 저축·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수렵 생활을 하던 때는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그만이었지만, 정착 생활이 시작된 뒤로는 어떻게든 그 지역에 머물면서 생활을 꾸려 가야 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보자. 한반도는 온대기후에 속하고 산과 바다가 인접해 있어 다양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농작물 재배는 물론 산과 들에서도 식량을 구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차가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거나 조개를 따러 가는 일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 저장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오래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곡물이야 장기 저장이 비교적 수월했지만 곡물만 먹고살 수는 없었다. 맛을 떠나 영양소 부족으로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당연히 겨울 이전에 확보한 다양한 먹을거리를 오래도록 저장할 방법이 고안되었다. 

음식의 장기 저장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건조와 염장, 즉 말리기와 소금 절임이다. 이러한 처리 과정으로 약간의 시간을 벌어도 음식은 결국 부패하기 마련인데, 부패가 심해지기 얼마 전 오히려 감칠맛이 올라오는 때가 있다. 바로 발효 작용에 의해서다.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경험을 통해 발효의 맛을 알아냈고 그 방법을 발명했던 듯하다. 3세기 중국의 옛 문헌에는 “고구려인들은 발효 음식을 잘 만들어 먹는다”라고 적혀 있고(《삼국지》 〈위지〉편의 ‘동이전’),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신부로 맞으면서 폐백으로 술, 장, 젓갈 등의 발효 식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제8권, 신문왕 3년). 또한 충청북도 보은의 법주사 절에 있는 대형 돌항아리는 삼국시대에 채소를 절여 저장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기록과 유물은 한반도 사람들이 일찍부터 발효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문헌 중에는 김장문화를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가 쓴 《가포육영(家圃六詠, 텃밭에서 여섯 가지를 노래함)》이라는 시다. 이 가운데 무를 보고 노래한 부분을 살펴보자.

무(菁)
장에 담그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得醬尤宜三夏食)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漬鹽堪備九冬支)
땅속의 뿌리가 날로 커지고(根蟠地底差肥大)
좋기는 잘 드는 칼로 배 베듯 자르는 것(最好霜刀截似梨)

△ 고려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김치


텃밭에 자라는 무를 보고 여름과 겨울에 먹기 좋다고 노래했는데, 어떻게 먹으면 좋은지 얘기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청(菁)은 순무를 뜻하는 한자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강화 순무와는 다른 재래종 무다. 고려시대에도 무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여름에는 장에 절이고 겨울에는 소금에 절여 저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문인인 목은 이색의 시에서도 누이가 보내준 오이 장 절임과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오이 장절임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 이규보의 시나 이색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소금이 아닌 장(醬)에 절인 채소 발효 식품이 등장하는 걸로 보아, 고려시대에 장김치도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김치’ 하면 떠올리는 ‘빨간색에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고려시대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어떻게 오늘날의 김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 『김치에 관한 세상의 모든 지식』(세계김치연구소 지음, 콘텐츠하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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